지혜롭게 사는 법/연애 결혼

외면과 내면의 이중적 잣대, 자기사랑, 상대를 고르는 기준

Eunylife 2020. 1. 19. 02:01

사람들은 대개 타인이 내 겉만 보고 평가하지 않고 내 속까지 알아봐주기를 원한다.

그러면 과연 자신은 남들을 겉만 보고 속단하거나 평가한 적이 없는가?

아무리 아닌 척 해도, 겉모습을 보고 미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니게 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나 생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첫인상으로 그런 판단조차 하지 않으면 자칫 본인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라도, 사람을 어떤 특성이나 유형으로 분류짓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보호적 기제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과 유사한 부류인지, 다른 부류인지도 무의식중에 겉모습을 통해 판단하여 경계와 위화감 혹은 안심과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것이다.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위험을 느끼거나 거부감을 갖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당연한 시스템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들이 나를 외면을 통해 평가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인간적 본성에 거스르는 일 아닌가?

내면까지 보면 좋겠지만, 사람의 눈은 먼저 외부 세계를 보고 나서 뇌로 처리하게 되어 있지, 그 내면을 먼저 투영하게끔 되어 있지 않다. 

내면은 좀 더 성숙하고 내적으로 경지가 높은 사람들이나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외면이 너무 별로면, 그 내면까지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본성에 따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게 당연하면서도, 굳이 외면을 가꾸지 않고 나를 내면으로만 봐주길 원하는 것은 이중적인 잣대 아닌가?

자신의 본성을 솔직하게 성찰해보고 나와 상대방을 대등하게 놓고 생각해보면, 외면으로의 판단을 버리고 내면을 아름답게 봐달라는 말이 얼마나 이중적인 말인지 알게 된다.

내면을 아무리 보고 싶어도 신이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는 외면의 장벽에 1차 진입문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중적이지 않은 기준을 세웠다.

내가 보기에 나 자신이 내가 원하는 연애 상대자의 모습일 만큼인가? (외면, 내면 모두를 말한다.)

내가 만약 어떤 멋진 남자가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첫눈에 반해서 먼저 적극적으로 대시하길 기다린다면,

나는 나의 이상형의 남자가 정말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거나 첫눈에 반해서 대시할 정도의 나 자신이 맞다고 스스로가 객관적으로도 인정할 수 있는가?

내가 만약 상대방이라고 가정한다면, 거울 속의 나 자신을 보고 반할 수 있는가?, 매력을 느끼거나 알아보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가?

 

내가 보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상대를 만나고 싶다는 게 이중적이지 않은 선에서의 나의 기준이다.

나보다 너무 잘난 것 같으면 기가 죽거나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 있고,

나보다 너무 못난 것 같으면 누구에게 떳떳하게 소개하거나 알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지면서 불만족과 불만이 쌓이고,

결국 두 경우 모두 위축되어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작아지며 자존감을 깎아먹는다.

 

나는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져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큰 부딪힘이 없었으면 좋겠고,

나와 비슷한 환경을 지니고 있어서 격차에 불편함이나 부적응 같은 어색한 기류가 없었으면 좋겠고,

나와 비슷한 성향이어서 서로 이해하며 공감하고 위로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나와 비슷한 정도의 매력과 외적 조건이어서 서로 손해보지 않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상대와의 다른 점은 서로 그저 이해하고 넘길 수 있을 만큼, 삶에서 큰 단점이 되기보다는 무시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 차이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꿀 수도 있는 장점으로 승화되기도 하다면 좋겠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도 사랑받고 나도 사랑하고 싶은 연인을 찾을 거라면,

내가 원하는 이상형이 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만큼의 상대를 바라는 것이 맞다.

분에 넘치는 상대를 찾고 싶다면,

그에 못지 않게 자기를 계발하고 더 낫게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게 맞다.

그래서 그 분에 넘치는 상대를 상대할 자신이 생겼을 때 비로소 그런 상대를 만날 수 있다.

 

결국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다.

누군가 원하는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면,

원하는 상대를 그리던 그 눈으로 자신은 어떠한 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짜 사랑을 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부터 진짜로 사랑하자.

한눈에 반할 만큼의 사랑을 하고 싶다면, 자기 자신부터 스스로에게 한눈에 반하자.

딱 거울 속의 나를 처음 본 사람의 눈으로 봤다고 생각하고 내가 판단했을 때의 그 느낌,

그만큼의 이성을 찾으면 된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노력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과욕을 부리지 말자. 과욕이 바로 이중 잣대다.

 

나는 탈코르셋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공감하던 입장이었다.

그런데 외모를 가꾸는 것은 위에 썼듯 본성적으로 남에게 좋게 보이려는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결론적으로 외모를 과하게 가꿔서 스스로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현재 나의 꾸밈에 대한 입장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꾸밈노동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 그것도 멋지다, 만약 내면만으로도 봐줄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라면 말이다.

 

외모를 꾸밀 때 오는 자신감은 내면에서 나오는 자신감과도 근원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화장은 지우면 없어질 껍질뿐인 자신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을 보임에 있어서 어떻게 봐주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이미지메이킹과 개성의 표출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생얼의 자신을 보여줌에 있어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며 자신감을 잃지 않는 모습을 바란다.

여성이 생얼로도 직장이나 결혼식이나 모임 등에서 비매너로 취급 받지 않고 당당한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할거면 그만큼 똑같이 자신의 외모를 크게 가꾸지 않는 남성을 만나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이상적인 생각과 달리 타인의 외면을 통해 판단하는 내 자신의 속물성을 마주한 적이 있기에,

나에게 외모지상주의로서 나를 깎아내리고 판단했던 사람들을 욕할 자격이 덜 된다고 느낀다.

시술, 성형까지 들이는 과한 외모지상주의 열풍은 사회적 낭비이자 그 시간에 더 세상을 유익하게 바꿀 수 있는 재능의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관이 있을 것이고,

나는 현재 내 가치관에서는 굳이 부작용이 있거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그런 것들까지 손대고 싶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몸에 칼을 대는 것은 나에게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행위로 보여진다.

 

나는 이대로의 나자신을 사랑할 것이고, 나만큼의 비슷한 상대를 사랑할 것이다.

언제 혹시 생각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현재 내 생각은 이렇다.

어쩌면 되게 이기적인 본성적 날것의 생각이다.

총체적으로 봤을 때 나와 똑같은 만큼의, 서로 손해보지 않는, 그런 연애를 하고 싶다.

이 마음으로 좋은 연애를 하기 위해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